1987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박종철 고문치사와 검사의 부검 명령서

어릴 적 뉴스나 어른들의 대화 속에서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솔직히 블랙코미디 영화에나 나오는 우스갯소리인 줄 알았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책상을 탁 쳤다고 억 하고 쓰러져 죽을 수가 있지?" 하지만 나이가 들고 극장에서 장준환 감독의 영화 <1987>을 마주했던 그날, 차가운 타일 바닥 위로 쏟아지던 욕조 물소리를 들으며 온몸에 돋았던 소름은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스물두 살, 아직 피어나지도 못한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청년 박종철. 1987년 1월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간 그는 차가운 주검이 되어 실려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 참극을 덮기 위해 대공수사처 박 처장(김윤석 분)은 서울지검 공안부장 최환 검사(하정우 분)의 집무실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 서류 한 장을 툭 내밀죠.
"어차피 빨갱이 하나 조사받다 심장 쇼크로 죽은 거요. 가족 동의도 다 받아뒀으니, 조용히 오늘 밤 안으로 즉각 화장(火葬)해 버립시다."

불길 속에 시신을 집어넣어 잿더미로 만들면 물고문의 멍 자국도, 목이 꺾인 흔적도 영원히 지워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서류를 훑어보던 최 검사는 삐딱하게 담배를 물고 경찰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거친 한마디를 꽂아 넣습니다.

"스물두 살짜리 건강한 놈이 갑자기 쇼크사로 죽어? 야, 이게 말이 되냐?
부검하기 전에는 화장 허가 도장 절대 못 찍어줍니다. 법대로 부검합시다!"

시신을 빼돌려 흔적을 없애려던 서슬 퍼런 공안 권력의 협박 앞에서도 끝내 물러서지 않고 발부한 '사체인도요구 거부권과 압수수색 부검영장'. 만약 이 종이 한 장이 없었다면,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그 뻔뻔한 거짓말 뒤에 진실은 영원히 암매장되었을 것입니다.

영화를 보며 문득 현실의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법률 제도 하나가 머릿속을 스쳤습니다.
"도대체 검사에게 무슨 법적 권한이 있길래 경찰의 화장 요구를 단칼에 거부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이 제도는 오늘날 평범한 우리 일상과 어떻게 맞닿아 있을까?"

교과서 속 딱딱한 법조문 뒤에 숨겨진 그날의 피 끓는 법적 기록들을 찬찬히 짚어보았습니다.


1. 화장을 가로막은 종이 한 장: 형사소송법 제222조 '변사자 검시권'

당시 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대공경찰을 상대로 일개 검사가 버틸 수 있었던 유일한 방패는 바로 형사소송법이 규정한 '변사자 검시 및 지휘 권한'이었습니다.

📌 대한민국 형사소송법 제222조(변사자의 검시)
① 변사자 또는 변사의 의심 있는 사체가 있는 때에는 그 소재지를 관할하는 지방검찰청 검사가 검시(檢視)하여야 한다.
② 사체의 부검 등 강제처분을 할 때에는 검사가 법관으로부터 압수영장을 발부받아야 한다.

이 조항은 비단 역사 속 사건에만 쓰이는 거창한 법이 아닙니다. 지금도 우리 일상에서 지극히 중요하게 작동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병원에서 지병으로 치료를 받다 의사의 사망진단서를 받고 임종을 맞이하는 경우가 아니라, 집에서 원인 모르게 갑자기 숨지거나 길거리 사고로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면 유족이라도 곧바로 장례를 치르거나 화장터로 갈 수 없습니다. 혹시 모를 타살, 독살, 혹은 억울한 사인을 밝혀내기 위해 경찰이 현장을 보존하고 관할 검사의 '검시 필증(시신 인도 허가)'이 떨어져야만 비로소 장례 절차를 밟을 수 있죠.

실존 인물 최환 검사는 바로 이 법률상 권한을 무기로 "사체 인도를 불허한다"며 영안실 문을 걸어 잠갔고, 법원에 긴급 압수수색영장을 청구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황적준 박사로 하여금 철저한 부검을 관철해 냈습니다. 법 조항 하나가 거대한 국가 폭력의 증거인멸을 완벽하게 저지해 낸 찰나였습니다.

2. 부검대 위에 드러난 진실: 형법상 '독직폭행치사죄'와 추악한 '꼬리 자르기'

외압과 회유를 뚫고 부검의가 작성한 감정서는 경찰의 각본을 산산조각 냈습니다. 박종철 열사의 사인은 심장마비 쇼크사가 아니라, 욕조 턱에 목이 짓눌려 숨진 '경부압박 질식사'였습니다.

  • 형법 제125조(독직폭행치사죄): 수사관이 인신구속에 관한 직권을 남용하여 피의자에게 폭행이나 가혹행위를 가해 사망에 이르게 한 죄입니다. 3년 이상의 유기징역(최대 무기징역까지 가능)에 처해지는 무거운 직무 범죄입니다.
  • 형법 제151조(범인도피죄)의 추악한 공모: 사인이 폭로되자 경찰 지휘부는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 두 사람에게 거액의 위로금과 가족 생계를 약속하며 '총대를 메고 자수하라'고 종용했습니다. 현장에서 함께 물고문을 가했던 나머지 공범 3명의 존재를 철저히 지우려 했던 국가 기관의 조직적인 범인도피이자 직권남용이었습니다.

오늘날 경찰서나 검찰청에서 피의자를 신문할 때 밀폐된 조사실 안에 CCTV 영상녹화 장비(형사소송법 제244조의2)를 켜두고, 변호인의 입회권이 철저히 보장되는 제도적 일상 역시, 바로 이 시절 자행되었던 밀실 고문과 조작의 뼈아픈 반성 위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3. 헌법 제12조 제2항: 피눈물로 아로새긴 '고문금지 원칙'

영등포교도소 보안계장과 교도관 한병용(유해진 분)의 목숨을 건 비밀 서신 전달, 그리고 1987년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공범 은폐 사실을 세상에 알리면서 감춰졌던 댐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습니다.

뒤이어 터진 연세대 이한열 열사의 최루탄 피격 사건은 침묵하던 보통 사람들의 가슴에 거대한 도화선이 되었고, 마침내 넥타이를 맨 회사원부터 시장 상인들까지 수백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폭발했습니다.

📌 대한민국 헌법 제12조 제2항 (1987년 개정)
모든 국민은 고문을 받지 아니하며, 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아니한다.

독재 정권의 항복을 받아내고 국민의 손으로 직접 대통령을 뽑게 된 현행 '1987년 제9차 개정 헌법'. 그 헌법 제12조에 또렷하게 박힌 "고문을 받지 아니한다"는 문장은 단순한 법 조항이 아닙니다. 남영동의 차가운 바닥에서 스물두 살 청년이 흘린 마지막 눈물과, 최루탄 연기 자욱한 아스팔트 위에서 시민들이 목놓아 불렀던 피의 서약이었습니다.

4. "그날이 오면" 광장의 버스 위에 오른 우리들의 이야기

영화 <1987>의 마지막 시청 앞 광장, 거대한 군중이 버스 위에 올라 태극기를 흔들며 함성을 지를 때, 삼촌을 잃고 두려움에 떨던 여대생 연희(김태리 분)가 마침내 군중 속으로 걸어 들어가 버스 위로 뛰어오르던 엔딩 장면은 볼 때마다 목구멍이 뜨거워집니다.

권력을 쥔 자들에게 법은 힘없는 개인을 억누르고 통제하기 위한 편리한 몽둥이였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자신의 양심을 걸고 화장 서류를 찢어버린 검사, 의사의 직업윤리를 지킨 부검의, 위험을 무릅쓰고 비밀 편지를 날린 교도관, 그리고 진실을 알린 기자들과 광장의 평범한 소시민들에게 법은 인간의 존엄을 지켜내기 위한 가장 숭고한 약속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말할 권리, 부당한 공권력에 맞서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가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영화 <1987>은 차가운 법전 너머 살아 숨 쉬는 역사의 심장 박동으로 우리에게 조용히 말을 건네고 있습니다.


🇰🇷 영화 <1987>을 다시 생각하며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었던 서슬 퍼런 군사정권 시절, 상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법대로 부검을 고집했던 최환 검사의 결단. 만약 내가 당시 그 자리에 앉아있던 법조인이었다면 현실의 타협 대신 양심의 법을 선택할 수 있었을까요? 여러분의 솔직한 생각을 남겨주세요."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극한직업>: 치킨집 대박 난 형사들, 공무원 겸직금지 위반으로 파면될까?

서울의 봄: 전두광의 군사반란

국제시장: 파독 광부의 지하 1,000m 탄광 매몰 사고와 해외 파견 근로자 산재 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