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서 출발한 실화, 생존을 건 노동자의 선택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는 대한민국의 직장 구조 속에 존재하는 ‘간접고용’, ‘외주화’,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간극’을 실화 기반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이 영화는 2010년대 중반 실제로 있었던 **한전KDN 협력업체 여성 파견 근로자**의 이야기를 각색한 드라마로, 평범한 노동자가 갑자기 ‘직장 내에서 지워지는 상황’에 맞서 싸우는 과정을 현실적으로 담아낸다. 주인공 정은은 전기검침원으로서 성실히 일해왔으나, 하루아침에 본사에서 외주업체로 전환되면서 기존 업무와 인간관계에서 배제된다. 정은은 자신이 ‘해고되지 않았지만 사실상 해고된 상황’임을 직감하고, 다른 지역 외부 현장에 배치된 후에도 굴하지 않고 스스로 자리를 지키려 한다. 이 작품은 고발이 아닌 성찰의 방식으로, ‘노동’이라는 단어에 감정과 인간성을 불어넣으며, 관객으로 하여금 현실 노동자들의 존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화려한 연출이나 드라마틱한 반전 대신, 조용한 분노와 끈질긴 현실 감각을 통해 이 사회의 시스템 속 침묵된 진실을 꺼내놓는 영화다.
고용 불안 시대의 투쟁, 정은이 맞선 구조의 벽
정은은 단순히 일자리를 잃을 위기에 처한 노동자가 아니다. 그녀는 수년간 쌓아온 숙련도, 동료와의 신뢰, 그리고 자존감을 하루아침에 잃게 된 사람이다. 그녀가 배치된 새로운 지역은 정규직과 외주직의 명확한 구분이 존재하는 곳으로, 정은은 이곳에서 ‘보이지 않는 사람’ 취급을 받는다. 일을 배우는 것도, 말을 거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 상황에서 정은은 점점 심리적으로 고립된다. 하지만 영화는 정은이 포기하지 않고 ‘일을 계속해서 하겠다는 태도’로 저항하게 만든다. 그녀는 대단한 시위를 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대신 출근하고, 일하고, 버티는 방식으로 자신이 이 자리에서 지워지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이러한 모습은 ‘노동’이라는 개념에 대해 흔히 갖고 있는 전투적 이미지와는 다른, **차분하지만 강한 저항의 방식**으로 관객에게 다가온다.
침묵과 무시, 그 안에서 피어난 연대의 희망
정은은 영화 내내 말수가 적고, 감정을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다. 그녀를 무시하던 사람들 중 일부는 점차 그 고요한 끈기를 보며 흔들리기 시작한다. 특히 같은 여성 근로자인 동료는 처음에는 냉담하게 대하지만, 정은의 일 처리 능력과 성실함을 보며 태도를 바꾼다. 이 영화는 노동 현장에서 여성이 겪는 이중적 불안—고용 불안과 성별로 인한 차별—을 조용히 짚어낸다. 결국 정은은 강한 리더가 아니라, **무너지지 않는 한 사람으로서** 존재의 가치를 증명한다. 그녀의 변화는 타인의 변화를 이끌고, 미묘한 시선 변화와 말없는 지지로 이어진다. 이러한 연대는 조직적 구조 바깥에서 생겨난 것으로, 시스템이 해결해주지 않는 인간적 따뜻함이 어떻게 관계를 회복시키는지를 보여준다.
조력자 분석 – 정은을 지켜본 현장 동료의 변화
처음에는 정은을 철저히 외면했던 여성 동료가 중반 이후부터 보여주는 변화는 이 영화의 전환점 중 하나다. 그녀는 감정적 친밀감 없이도 실력을 인정하고, 묵묵히 도와주는 방식으로 정은의 존재를 지워버리려던 분위기에 틈을 낸다. 그녀의 도움은 언뜻 미미해 보일 수 있으나, 실질적으로 정은이 현장에서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도록 **조용한 방패** 역할을 한다. 직접적인 말이나 감정 표현보다, 작은 행동들—예를 들어 도구를 대신 건네준다든가, 위험한 현장에서 신경을 써주는 모습—이 곧 조력자의 역할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도와준다’는 행위 자체가 거창하지 않아도 충분히 누군가의 삶에 깊은 영향을 줄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 조력자는 결국 정은이 다시 ‘내 자리’에 설 수 있도록 힘을 보태는 존재가 된다.
내가 정은이었다면, 출근을 계속할 수 있었을까?
정은은 말 그대로 ‘해고되지 않았지만 쫓겨난 상태’다. 내가 그 상황이었다면, 과연 회사에 계속 출근할 수 있었을까? 가족을 생각하고, 자존심을 내려놓는 것까지는 가능할지 몰라도, 매일 싸늘한 시선을 견디며 자리를 지키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다. 정은은 침묵으로 저항하고, 일로써 존재를 증명한다. 이는 쉽지 않은 방식이며, 감정적으로 큰 상처를 수반한다. 내가 그 입장이었다면, 아마 중간에 포기하거나 법적 대응에 의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은은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존재하며 시스템을 ‘조금씩 흔드는’ 방식을 택한다. 그 용기와 절제는 단지 이 영화의 미덕이 아니라, 지금 사회가 진정 필요로 하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말 없는 저항의 가치, 고용의 존엄을 되묻다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는 큰 목소리를 내지 않고도 얼마나 강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영화다. 노동을 말할 때 빠지기 쉬운 구호나 분노가 아닌, **개인의 존엄**을 중심에 두고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 영화는 직장을 다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는 지금 이 자리를 어떻게 지키고 있는가’를 묻게 만든다. 단순히 해고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인정받는 싸움**이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공감 이상의 무게를 가진다. 정은의 이야기는 특정 계층이나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이 사회에서 일하고 있는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문제일 수 있다. 이 영화는 소리 없이 말한다. “나는 여기 있다. 나는 아직 나를 해고하지 않았다.”